저는 아슬란입니다. ‘백수’의 왕이죠

Posted by DAKI MAGAZINE
2018.08.21 08:00 자동차 스토리&차소서&차소설

사자의 품격을 지닌 아슬란, 인사드립니다. 사실, 인사드릴 기분은 아니네요. 다들 아시다시피 백수 신세라 먹고살기 막막한 형편입니다. 그래도 모처럼 저를 찾아와 주셨는데, 자기소개 정도는 해야겠죠? 

 

커피는 뭐로 드릴까요? 블랙이랑 프림 듬뿍 커피 있는데.

  


아슬란, 독일녀석들을 막아라!




‘한때’ 현대자동차의 플래그십 세단이었던 아슬란입니다. 지난 2014년 10월 말 현대차 가문 아산공장에서 태어나 많은 기대를 받았습니다. 형제로는 맏형 에쿠스, 큰형 제네시스, 동생 그랜저(HG)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셋째이긴 하지만 사회생활 경험으로는 에쿠스, 제네시스 형님들과 동생 그랜저가 저보다 먼저 사회로 진출했죠. 때문에 세 명이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성공해야지! 할 수 있어!”라는 파이팅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AG라는 태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가 태어나자 집(현대차)에서는 터키어로 사자를 의미하는 ‘아슬란’이란 이름을 제게 부여했습니다.   



  

 

사자의 눈매가 저와 비슷하네요


아슬란은 반지의 제왕과 쌍벽을 이루는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에서 나오는 사자의 이름이기도 한데요, 위풍당당한 카리스마로 대한민국을 호령하라는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들은 제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벤츠 E 클래스, BMW 5시리즈, 아우디 A6, 폭스바겐 파사트 같은 독일 녀석들이 우리나라 준대형급 이상 세단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거든요.

 

좀 더 정확이 이야기하자면, 그랜저를 몰던 운전자들이 한 단계 높은 차로 갈아탈 때 제네시스, 에쿠스 형님들이 아닌, 벤츠 E 클래스, BMW 5시리즈 같은 수입 프리미엄 세단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죠.

 

집에서는 제가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을 독일 녀석들에게 뺏기지 않고 방어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라고 교육했습니다. 무슨 국방의 의무도 아니고… 내심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저도 나름 프리미엄 세단이었기 때문에 자신감 하나만 믿고 가기로 했습니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은 동생 그랜저 인기를 갉아먹지 않겠냐는 훈수를 두었지만, 수입차 대항마가 필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뭐, 제가 굳이 그랜저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요? 그저 제가 할 일만 하면 될 뿐!

  

프리미엄을 항한 노력 


이제 제 외모를 말씀드릴 시간이 왔네요. 잠시 커피 좀 마시고…(후루룩 역시 프림이 있어야 제맛이지)   




쏘나타와 제네시스


당시 저희 집안에서는 ‘플루이딕 스컬프처 2.0’이라는 기묘한 외모가 유행이었습니다. 덕분에 사촌동생 LF 쏘나타와 제네시스 형님을 섞어놓은 듯한 외모였죠. 

 

사전 예약을 받고 실제 판매가 이루어지던 시기만 해도 "고급스럽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여러 매체들도 복사+붙여 넣기 신공을 펼치며 “정말 기대됩니다!” 하던 시기였습니다.   



전 동생 그랜저와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동일한 뼈대를 기반으로 덩치를 조금 더 키웠습니다. 때문에 몸집은 그랜저와 제네시스 형님 사이 정도입니다. 여기에 독일 녀석들과 영혼의 맞ㄷ…아니 대결을 펼치기 위해 람다 3.0 V6 GDI 혹은 람다 3.3 V6 GDI 엔진을 심장으로 달았습니다. 

 

람다 엔진은 2005년 현대차에서 내놓은 V형 6기통 가솔린 엔진입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던 미쓰비시 아주머니가 만드시던, 시그마 엔진 다음으로 나온 모델이죠. 주로 미국으로 유학 가던 친척들과 사촌 베라크루즈, 싼타페, 쏘나타, 동생 그랜저의 체력을 책임졌습니다. 나중에는 5촌 아저씨 K7도 같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제 심장(제가 사용한 람다 엔진)은 조금 더 특별했습니다. 람다Ⅱ GDI 모델로 두 번 정도 출력과 품질 개선이 이루어졌죠. 2020년 람다Ⅲ가 나온다고 하는데, 제 체력을 늘리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데, 현재 제가 백수라 사용할 일은 없겠네요.

 

람다 엔진의 장점은 튼튼한 체력과 민첩성을 위해 고압 주조 알루미늄 엔진 블록을 사용했고, 이리듐 점화플러그를 사용해 부품 내구성까지 올려 안정성을 개선한 점이죠.   



다시 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제 존재 이유이기도 하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카리스마 있는 외모 외에도 멋들어지게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이 제 장점입니다. 소비자들이 가장 원하는 승차감, 정숙성, 실내 고급화를 최대한 반영했기 때문이죠. 마치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형 양복을 입은 듯한 분위기죠. 

 

대표적인 특징만 말씀드리자면, 부드럽기로 유명한 나파 가죽과 샤넬 가방에서나 볼 수 있다는 퀼팅 박음질이 적용된 시트에 센터패시아 버튼들을 피아노 건반처럼 만들어 멋을 한층 더 끌어냈습니다.

 

첨단 기능을 살펴보면 헤드업 디스플레이(HUD)와 8인치 고급 내비게이션이 편의사양으로 적용되었고, 전방 추돌 경보장치(FCWS), 차선이탈 경보장치(LWDS), 후측방 경보장치 (BSD), 적용 9에어백, 액티브 후드 시스템 등 많은 것들을 집어넣었습니다. 

 

어떤가요? 스마트하고 젠틀하고, 때로는 남성미 넘치는 신사의 모습이죠?

 

일부 소비자들은 “그랜저 고급 튜닝 버전이다!”라고 비아냥 대지만 같은 형제인데 뭐 어떻습니까? 품질은 제가 좋기 때문에 기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형제끼리 싸우면서 큰다는데 괜찮습니다. 전 관.대.하.니.까.요.   



제 몸값은 3,990~4,640만 원으로 동생 그랜저보다 약 천만 원 정도 비싸고 제네시스 형님보다 600만 원 정도 저렴합니다. 요즘은 잊히고 있는 형편이지만,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하루 120대씩 사전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SM7과 알페온 등 경쟁하던 친구들은 저 때문에 힘을 못쓰던 시기입니다.   



또한 특별 전시공간 ‘아슬란 스페이스’까지 운영되었습니다. 요즘 제네시스 형님이 전용 전시관을 개관했다던데 옛날이 생각나는군요  

 

백수가 된 백수의 왕


현대차 가문에서는 저에 대한 반응이 좋자, 2015년에는 22,000대 정도 판매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2015년이 지나고 결산을 해보니, 8,629대 밖에 판매되지 않았습니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죠. 

 

저 또한 잘 되리라 믿었는데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이렇게 실적이 저조했나 살펴보니, 독일 녀석들과 경쟁하기에 연비도 낮고 엔진 출력도 조금씩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분하지만 별 수 있나요, 원래 잘 나가던 녀석들인데… 




게다가 동생 그랜저와 제네시스 형님 사이에 제가 있다 보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한 점도 한몫했습니다. 특히 기업 임원들을 타깃으로 삼아 법인차량 판매를 기대했는데, 기업 임원들은 모델명이 생소하고 차라리 조금 더 보태 제네시스를 구매하겠다는 의견까지 보였습니다. 

 

참 인생은 에스프레소처럼 쓰디쓴 맛이더군요.  


자동차를 잘 아는 분들은 “차라리 다이너스티 후속으로 등장했다고 했으면 더 잘 팔렸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다이너스티는 제 작은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 2세대 뉴 그랜저의 형제 뻘로, 고급 페이스리프트 버전이거든요. 제가 동생 그랜저의 고급 버전이듯 나름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거죠. 

 

하지만 작은 할아버지는 확실한 개성이 있었죠. 게다가 저와 같이 애매한 위치도 아니었죠. 그래서인지 추억의 올드카를 꼽으면 증조할아버지 그라나다에 이어 꼭 언급되는 분이십니다.

 

시간이 지나자, 집에서 저를 보는 눈빛이 싸늘해졌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해 직접 물어봤더니 “너는 내수 시장용이라 어디 쓸 데가 없어.” “우리 잘못이긴 한데, 너를 급하게 만든 것도 있지. 정통 플래그십 세단 느낌이 없어”

 

네 그렇습니다. 저는 태어난 것이 죄입니다…서럽네요.

 

분명 집에서는 독일차들이 하나의 모델을 가지고 여러 가지 파생 모델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도 하자!”라고 해서 제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단 한 가지, 브랜드 인지도 생각을 못했던 것이죠.   



한편 제가 찬밥 신세가 되어가던 중 동생은 IG로 승진했습니다. 하는 프로젝트마다 잘 되면서 국민 세단이라는 칭호가 붙는 레벨로 확 뛰어올랐기 때문이죠. 그랜저는 승진하면서 옷도 세련되게 입고, 머리도 빗질하면서 제가 따라잡을 수 없는 안드로메다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뭐, 동생이 잘 돼서 좋기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의 불씨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긴, 예전엔 동생이 집안 살림을 담당할 만큼 사회적 위치가 대단했었고, 요즘은 대중적으로도 인기 높죠)



게다가 제네시스 형님은 원래 현대차 가문에서 “실수로 잘 만든 녀석”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잘 나가던 터라 제가 설자리는 1mm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2016년에 저도 외모를 가꾸고 소비자들에게 사랑받고자 노력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재고 처리 행사를 전전하다 2017년 12월, ‘가문에서 대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훤칠하고 능력도 좋은 친구가 어쩌다…쯧쯧…”  



저는 아슬란입니다. ‘백수’의 왕 사자입니다. 제 경력은 3년 2개월입니다. 혹시 몰라 구직 중이지만 소문 때문인지 취업이 힘듭니다. 

 

혹시 제 능력이 필요하신 분은 우리 집(현대차 아산공장) [041-530-5114]으로 전화 주세요. 

 

아, 혹시 가시기 전에 점심 좀 사주실 수 있나요?



저는 아슬란입니다. ‘백수’의 왕이죠

글 / 다키 매거진

사진 / hyundai, wikimedia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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